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비발디 (문단 편집) === 만토바의 궁정악장, 베네치아로의 복귀 === 베네치아 토박이였던 비발디는 가족이나 피에타 학교 학생들과 종종 연주여행을 다니기는 했지만 그의 생활기반은 어디까지나 베네치아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40살이 되던 1718년 드디어 베네치아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만토바]]의 영주였던 [[헤센]]-[[다름슈타트]]의 필리프가 그에게 궁정악장직을 제안한 것. 비발디는 1725년까지 만토바에 있었는데 이 7년의 기간동안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는 그의 대표작이 된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가 작곡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후반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 다만 비발디가 7년간 만토바에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신의 고향인 베네치아와 만토바를 왔다갔다 했으며 피에타 학교의 선생직도 계속 유지했다. 또한 로마, [[밀라노]], [[비첸차]] 등을 방문해서 자신의 오페라를 초연하기도 했다. 만토바의 궁정악장이었던 시기에 비발디는 젊은, 아니 어린 여가수 안나 지로(Anna Tessieri Giro)를 만나게 된다.[*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유가 비발디를 처음 만났을 때 안나 지로의 나이가 많게 잡아봐야 10대 중반의 소녀였기 때문. ] 비발디가 안나 지로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일단 기록상으로 두 사람에 만난 것이 확실시 되는 최초의 시점은 1723년이다. 비발디는 만토바의 궁정악장이 된지 7년만인 1725년에 사직하고 베네치아로 복귀한다. 비발디가 만토바에서 7년간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베네치아에 돌아오자마자 보라는 듯이 자신의 오페라 4개를 연달아 상연한 것을 보면 음악활동 측면에서 베네치아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궁정악장은 작곡과 연주외에도 다른 업무가 많기 때문에 음악활동에만 전념하기 쉽지 않다. 또 비발디는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기 원했는데 만토바보다는 베네치아가 훨씬 활동하기 좋았다.] 비발디는 1730년대 후반까지 활발하게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특히 안나 지로는 1726년부터 거의 비발디의 전속 가수처럼 비발디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도맡았는데[* 다만 안나 지로가 비발디의 오페라에만 출연했던 것은 아니다. 또 1726년 이후에 작곡된 비발디의 모든 오페라에 출연했던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되는 안나 지로 항목 참조. 비발디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서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칸타타를 의뢰하기도 했으며,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비발디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핵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의 [[빈(오스트리아)|빈]]과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그의 오페라가 상연되기도 했다. 이런 카를 6세의 관심에 감읍한(..) 비발디는 자신의 9번째 기악작품집을 카를 6세에게 헌정했고 1730년에는 카를 6세의 배려로 부친과 함께 빈과 프라하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프라하에서 아그리포(Agrippo, 1730)와 고트족의 여왕 알빌다(Alvilda regina de' Goti, 1731) 두 오페라를 초연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